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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싸인제도는 합리적인가?

  요즘은 직장에서 결재할때 도장 대신 싸인으로 처리하는 일이 보편화 되었다. 사생활에서도 싸인을 사용하는 기회가 늘고 있고, 드물게 일반인들도 도장을 사용하지 말고 싸인으로 대신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모든 서양문화를 여과없이 받아 들이는 풍조가 만연한 현실로 볼때 서양문화 유산의 하나인 싸인제도도 냉철한 검증 없이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시점에서〈과연 싸인제도는 합리적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사심이나 편견없이 지극히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으로 분석하는 일이 중요한 일로 대두되었다.

  우리 모두 아무 선입견 없이 평정한 마음으로 인장제도와 싸인제도의 비교 분석 여행을 떠나 보자

1. 인감증명법을 쓸수없는 싸인제도

  현 인장제도 하에서는 본인의 인장이 틀림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인감증명법이란 것이 있다. 그런데 만일 도장을 사용하지 않고 싸인제도를 시행한다면, 현행 인감증명법은 의미가 없어 폐지하고 순전한 신용거래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싸인제도에서도 인감증명법을 유지하려면 인장 대신 자기 싸인을 인감에 등록해 두어야 할텐데, 이럴 경우 당장 다음과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동산 매매를 한다든가, 전세 입주를 한다든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든가, 누구에게 돈을 빌려 준다든가 할때에는 해당 문서에 싸인을 하고 그것이 본인의 싸인이 틀림없다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싸인이 등록된 인감증명서를 주거나 받아야 할 것이다

  이때 당장 문제가 발생한다. 인장제도 하에서는 날인한 인영과 인감증명서에 등록된 인영이 같은 것인지 아닌지 누가 보아도 금방 식별할수 있지만 싸인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싸인은 본인이 앉은 자리에서 백번을 쓴다 해도 백번 다 다르다. 하물며 오늘 한 싸인과 1년 후에 한 싸인, 젊어서 한 싸인과, 나이 들어 한 싸인, 술 취했을때 한 싸인, 피곤할때 한 싸인, 심리적으로 괴로울때 한 싸인은 사실 본인 스스로도 이것이 내 싸인이었던가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변한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아래에 유명한 싸인을 한가지 예시하겠는데, 바로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이 평생에 걸쳐 서명한 싸인을 한데 모아놓은 것이다. 모두 함께 음미해 보기 바란다

나폴레옹
1세의
싸인 변화
황제 즉위시 아우스텔리츠승리 1806년 전후
모스크바입성후 러시아 패전후 라이프치히패전 황제 퇴위후

  여러분도 싸인이란 이렇게까지 변하는 것인가 하고 놀랐을 것이다

  이와같이 서명한 싸인과 인감증명서에 등록된 싸인이 같은 사람 것인지 아닌지 현장에서 즉시 확인할수 없다면 인감증명법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니 폐지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제도 하에서는 주민등록증이 사기에 이용될 무서운 무기가 될 것이며, 사악한 사람이 누군가의 주민등록증을 습득하거나 훔치기만 한다면 다양한 사기를 저지를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사실은 지금 이 시간에도 타인의 주민등록증을 이용한 카드 범죄 같은 것이 급증하고 있지만 인감증명에 관계된 범죄는 매우 드물다. 그만큼 현행 인감증명제도가 안전하고 확실한 제도임을 무언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2. 필적 감정―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싸인이란 것이 앉은 자리에서 백번을 써도 백번 다 다른만큼, 실은 누군가 위조하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위조 역시 쉽다는 결론이 나온다. 본인의 싸인이 쓸때마다 똑같지 않으니 위조한 싸인 역시 육안으로 허위를 식별하기가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싸인제도에서 단하나 믿는 것은 필적 감정인데, 실은 이 필적 감정이란 것이 말처럼 그렇게 확실히 믿을 것이 못된다

  왜냐하면 인장은 두개의 인영이 크기, 모양, 위치, 굵기 등 모든 것이 똑같은가 아닌가만 확인하면 그만이지만 - 싸인은 쓸때마다 다르므로 필적감정은 싸인의 모양이 똑같은가 아닌가를 보는것이 아니라, 본인이 구사하는 특징 즉 힘의 강약, 스타일, 패턴 같은 요소를 파악하여 감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반드시 필적감정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어쩌면 어떤 사람이 30세때, 그것도 심신의 모든 컨디션이 좋을때 한 싸인과 40세때 여러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불안하고 피곤할 때에 한 싸인이 같은 사람의 싸인이라는 것을 필적감정으로 밝혀낼수 있을지 심각한 의문이 든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실제로 힘이 들어가는 패턴마저 변하기 때문이다

  또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설령 필적감정이 100% 진위를 밝혀낼수 있다 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벌어진 다음에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쓰게 되는 반면, 인감증명제도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차원에서 쓰여지니 이 얼마나 큰 차이인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와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튼튼히 하는 차이이니, 안정된 사회를 이루는데 중대한 요인이 되는 사안이라 할 것이다

3. 싸인 결재와 싸인 도장의 모순

  싸인제도의 좋은 점을 꼽으라면 역시 편리하다는 점일 것이다. 어디서든 볼펜 한자루만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쉽고 편리하면 그만큼 허점도 많고 불미스런 일이 일어날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인장을 휴대하는 불편 정도는 사회의 안녕을 위해서 감수할만한 수고라 본다

  요즘 직장에서는 싸인 결재와 전자 결재가 보편화 되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사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직장 내에서 싸인결재 제도가 시행된 이후 자기 싸인을 고무인이나 인장으로 제작하여 싸인도장으로 결재하는 사례가 종종 있다

  왜 그럴까? 싸인 한번 하는것이 아무것도 아닌것 같지만 결재 횟수가 많다든가 컨디션이 안좋아 짜증이 날때에는 싸인하는 것도 귀찮아 진다. 왜냐하면 수천, 수만번 하는 싸인이라도 어떤 때는 좀더 멋지게 되는가 하면 어떤 때는 볼품없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싸인을 할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불품있게 하려고 신경을 쓰게 되는데 컨디션이 안 좋을 때에는 이것마저 귀찮아 지는 것이다.

  아마도 싸인결재가 빈번한 곳에서는 결재용 싸인도장을 이용하는 사례도 공존하리라 보는데, 이 또한 인장 사용의 편리함과 확살함을 무언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농협 출납계와 같이 날인 빈도가 높은 곳에서는 싸인으로는 감당할수 없으며 여전히 도장을 사용하고 있다

4. 누가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 ?

  서구사회에서 싸인제도가 정착된 것은 싸인제도가 좋아서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인장 문화―라기 보다는 인장과 유사한 조각 문화는 고대시대로부터 거의 세계 전역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과 용도에 있어서는 문화권마다 차이가 있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지역적 특성, 문화적 특성, 생물학적 특성 등의 요인에 의하여 점차 진화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었다.

  중세 시대의 서구사회에서도 인장 문화의 잔재는 남아 있었지만 주로 귀족사회에서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을 조각하거나, 끼고 다니는 반지에 문장을 새겨두고 필요한 경우에 반지의 문장을 대상물에 압인하여 자신과 가문의 위상을 확인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나마 민중혁명으로 귀족사회가 무너진 후에는 귀족사회의 잔유물인 인장문화는 외면 당하고 사라졌으며, 자연스럽게 서명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결국 서명제도는 신용사회라는 기초 위에서 유지될수 있는 제도인데 신용사회가 무너진다면 언제든지 위험이 발생할수 있는 도화선을 안고 있는 제도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동양권, 특히 한국에서 싸인제도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내가 무엇때문에 싸인제도를 희망하는가? ―하고 반문해 볼때 혹시라도 서구문화의 모든 것을 선진국 문화라는 선입관 때문에 냉철한 검증도 없이 무조건 다 우수하게 생각하는 주체성 없는 자세에서 나온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참으로 슬픈 일중의 하나가, 왜 우리 우수한 한국인들이 그토록 주체성이 부족한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과거 중국문화에 종속되었던 사대주의 사상, 그리고 지금도 외국에 나가있는 교포 2 세들의 자기 문화 보전과 계승정신이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비해 부족한 것을 볼때 납득이 가지않고 부끄러운 심정이다.

  바로 이러한 주체성의 부족에서 나오는 유치한 생각은 아닌지 스스로 살펴보아야 한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심리적인 정서 자체가 다르며, 이것은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생물학적인 특성 자체가 다르기 때문임은 이미 정설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우리의 생리적 특성, 정서적인 특성에 맞게 형성된 인장 문화, 더욱이 유구한 세월에 걸쳐 뿌리깊게 정착되었고 모든 점에서 안정된 사회 조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인장제도를 마다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음을 재인식하기 바란다

5. 예술과 함께 하는 확인 행위

  모든 예술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중 하나이다. 특히 전통예술은 한 민족의 정서에 안정과 충족감을 심어주는 보이지 않는 요소로서 매우 중요하며, 그래서 전통예술을 보전하려고 국가 차원에서도 애쓰고 있는 것이다

  인장은 이미 말한 것처럼 훌륭한 예술이다. 더욱이 실생활의 필수품이면서 동시에 예술성을 동반하는 분야는 인장 외에 그리 많지 않다

  옆에 예시한 인영은〈인각교본―김기동 편저 1975년 신서출판사〉에서 발췌한 작자 미상의〈한국변론학회〉란 직인인데,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은 이미 글씨가 아니라 한폭의 그림이다.

  조무법을 이용한 절묘하고 균형 잡힌 조형미, 적절한 여백 처리로 시간가는줄 모르고 들여다 보게 되는 훌륭한 작품이다

  한글 인장의 예술성은 아직도 시작 단계에 있지만 이렇게 좋은 한글인장 작품을 볼때 정상 도달도 그리 멀지 않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아무튼 인장제도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학식, 문맹 여부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누릴수 있고, 확실하고, 안전이 보장되는 유익한 제도이면서 더불어 예술의 향기까지 맡을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제도인가?

  길이길이 영위하고 보전해야 할 전통문화 예술이다

6. 싸인제도는 제도의 폐지일 뿐이다

  싸인제도라고 하면 무슨 특별한것 같지만 사실은 그냥 서명이란 말과 같은 것이다. 쉽게 말하면, 현행 인장제도 하에서는 서류 작성을 한 다음 서명 즉 자기 이름을 쓰고 옆에 도장을 찍고 인감증명서를 첨부하여 〈내가 작성한 문서가 틀림없다〉는 것을 보증하는데―이것을 그냥 이름만 쓰고 끝내자는 것이 바로 싸인제도이다.

  예를 들자면, 누가 전세 입주를 하면서 방 주인으로부터 계약서에 자필 서명 하나만 받고 수천만원의 전세금을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주민등록증 위조 사기가 빈번한 이 시대에!

  그리고 나중에 사고가 발생하면 필적 감정으로 진위 여부를 확인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험하고 허술한 제도가 어디 있겠는가?

  개인이든 국가든 서로 상대방의 좋은 점은 받아들이고 나쁜 점은 시정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인장제도 역시 우리 쪽에서 허술한 싸인제도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서구사회에서 안전하고 유익한 우리의 인장제도를 영입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실제로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서구권이 단연 앞서 있지만 정신문화 세계는 동양권이 우수하다는 것을 깨닫고 명상이라든가 선이라든가 무예 같은 분야에서 서구인들이 동참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지 않는가?

  모든 한국인들이여, 우리 모두 주체성을 가지고 우리의 좋은 것을 지키고 전하는데 앞장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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